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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형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던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신제품 소식을 접하는 것이 하나도 놀랍지 않고 극도로 마이너한 제품이 나와도 시큰둥하다. 인터넷만 열면 수천 가지 모형을 살 수 있고 재료와 도구도 엄청나게 다양해졌다. 흰색 락카 하나가 모형 작업을 방해하던 시절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부족한 정보, 부족한 재료가 열정을 방해하던 시절은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이제는 핑계가 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모델러들의 결과물도 발전했는가? 그렇다. 정말 발전했다. 당시 가장 날고 기는 모델러들이 솜씨를 뽐내던 잡지 기사와 비슷한 수준의 결과물은 어느 정도 열정만 있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고(물론 경우에 따라), ‘이 정도까지 만들 수 있는가’라며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작품도 쉽게,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보다 더 가슴을 뛰게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분명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고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도 전 세계의 모형 재료와 기술을 접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왜 부족한 것이 많았던 그때만큼 내 가슴은 뛰지 않는가?
“그건 너무 풍요롭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인가, 난 지금도 사고 싶은 모형과 만들고 싶은 모형이 많은데 풍요라니? 하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핍은 열정을 방해하지만, 동력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색칠 스타일이 너무 궁금한데 과거라면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다. 당시 저 차량의 색이 무엇인지 궁금한데 알 도리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 장면에 어울리는 인형이 필요한데 적당한 제품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은 결핍에 해당한다. 이런 결핍은 열정을 방해하지만 동시에 열정을 유지하는 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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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요즘 같은 풍요의 시대라면 커뮤니티, 유튜브, 쇼핑몰을 딸깍거리면 대부분의 의문이 해소된다. 내가 그걸 할 수 있고 없고는 다른 문제고, 일단 어떻게 하는지, 어디서 무엇을 사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순식간에 해소된다. 사람의 심리는 묘해서 모든 의문이 해소되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되고 열정 또한 느긋해진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풍요는 이런 물질적인 것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작례는 솔직히 말하면 나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과정이 절차적으로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작례 한번 보려고 찾아봤다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와… 도대체 이 사람은 이걸 이렇게 칠했다고? 이걸 이렇게 만들었다고?
놀라운 작례가 차고 넘친다.
놀라움의 풍요는 놀라움 자체를 희석시키고 나의 기준을 높인다. 감탄의 기회가 많아지면 감탄의 강도가 떨어진다. 적응하기 때문이다. 놀라움과 감탄이 지나치면 일상이 된다.
‘나도 저 정도 만들 수 있을까?’
‘저 정도 만들지 못한다면 굳이….’
‘저 정도 만들려면 너무 힘들겠는데…. 다른 것 만들어야겠다.’
우리가 모형을 만들기 시작한 동기는 만들기가 좋거나 모형 자체가 좋아서였는데, 어느새 결과물의 완성도가 나의 열정을 방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풍요롭지 못했던 과거가 더 좋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흰색 락카 한 병 사자고 발품 팔던 시대로 역행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문제는 풍요 그 자체가 아니라 풍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언제든 살 수 있고, 언제든 찾아볼 수 있고, 언제든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손에 들어오면 기다릴 필요도, 궁리할 필요도, 하나에 오래 매달릴 이유도 줄어든다. 더구나 매일같이 쏟아지는 뛰어난 작품은 어느 순간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넘어야 할 기준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모형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잘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모형이 좋았고, 만들고 싶었고, 내 손으로 하나씩 형태가 갖춰지는 과정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완성된 결과물은 그 즐거움의 결과였지 목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풍요로워지면서 어느 순간 순서가 뒤바뀌었다. 더 좋은 재료를 찾고, 더 좋은 도구를 사고, 더 뛰어난 작품을 보고, 더 높은 완성도를 목표로 삼는다. 정작 모형 하나를 꺼내 부담 없이 만드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어쩌면 풍요의 시대에 열정을 유지하려면 약간의 결핍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지금 가지고 있는 모형 하나를 꺼내 내가 만들고 싶은 방식으로 그냥 만들어 보는 것이다.
풍요를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풍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약간의 결핍을 선택하자는 이야기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도, 얼마나 잘 만들었는가도 아니다.
“내가 왜 이것을 만들고 싶었는가?”
풍요로운 시대일수록 가끔은 주변의 넘쳐나는 것들을 걷어내고 그 단순한 질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결핍은 열정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열정이 자라날 빈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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