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선쪽 이외에는 별로 안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예전 글 재활용 겸.....하여간 의외로 후대 군함들에까지 많은 귀감(?)이 되는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때 확립된 원칙들은 현대에까지 하나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귀중한 인명의 희생으로 밝혀진 교훈은 아직도 군함의 설계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말할수 있겠지요. 수뢰정 「우학 - 友鶴」 ("토모즈루" 입니다만 여기선 한자 표기 그대로 읽겠습니다.) 1921년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주력함(전함)의 건조 제한이 가해지자 각국은 조약의 제한 외인 순양함을 새로운 건함 경쟁의 시작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 폐단을 없애고자 1930년의 런던 군축조약에서는 순양함도 제한되어 일단 해군의 건함경쟁을 대강 정리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ㅅ-; 제 3차 전간기 건함경쟁은 전혀 다른데서 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느시대건 상대보다 좋은 무기를 가지고 싶다는것은 원초적인 욕구인가 봅니다. 1930년의 런던 군축조약에서는 워싱턴 조약이 간과한 거의 모든 보조함에 대해서도 엄격한 제한이 가해졌습니다만 단 한가지......기준배수량 600톤 이하의 소형 수상 전투함에 대해서는 보유량의 제한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착안한 미국과 영국 일본, 그리고 「이외」의 각국(런던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던 프랑스-이탈리아도 포함)도 이 사이즈에 상당하는 군함을 앞다투어 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일본의 이 치도리급(千鳥) 수뢰정도 그 중 하나로서 건조되었습니다. 최초 계획에서 이 수뢰정은 12.7센치 포탑 단장/연장 각 1기, 53센치 연장 어뢰발사관 2기와 예비 어뢰 4개라는 하츠하루급(初春) 구축함(신조시)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공격무장을 기준 배수량 535톤이란 동형 구축함의 1/2이하의 작은 선체에 담은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선체에 비해 중무장...게다가 외양 작전이 가능한 능파성을 요구해 높은 건현이라는 조건에서는 복원성이 저하하는 것도 당연했기에 1번정 치도리는 1933년의 준공시에 벨러스트 40톤을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시 28 노트로 15도의 전사(회전운동)를 행했는데 무려 30도나 경사해 버렸습니다. orz 거기서 급거 벌지를 추가, 재공시에서는 경사가 20도까지 억제되었으므로 일단 완성이라고 평가되어 해군에 인도되었지요. 덧붙여서 이 시점에서의 복원성 범위는 64.2도였다고 합니다만 사실 대부분의 군함이라면 90도 이상이 당연(즉 계산상은 옆으로 쓰러져도 괜찮다라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취역한 것은 무리가 있지 않았겠냐는 저같은 아마추어의 눈에도 확실히 보이는군요. -ㅅ-; 결국....최악의 해난사고는 다음해인 34년 2월, 3번정 우학(友鶴)이 취역하고 한달 뒤에 벌어진 훈련때 일어났습니다. 1934년 3월 12일 새벽,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시작된 연함함대 함대 대연습 중 치도리와 함께 대항군으로 편성된 경순 타츠타에 대한 야간 습격 훈련으로 향하던 우학은 악천후로 훈련을 중지, 모항인 사세보에 돌아가는 도중에 소식이 끊겼습니다. 수색작업이 벌어졌고....전복 표류중인 동 수뢰정이 발견된 것은 동일 오후 2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간신히 찾아낸 우학은 경순 타츠타가 거친 바다를 헤치며 사세보 공창까지 예항해 도크에 집어넣었지만 생존자는 도중에 자력 탈출한 3명을 포함해 합계 13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인명 피해는 정장 이하 100명.... 이 조난극이 이른바 「우학사건」입니다. 이 우학의 전복 조난 사고를 계기로 일본해군은 전 함정을 조사한 결과 치도리급이나 하츠하루급과 거의 동시기에 설계된 대부분의 함정에 복원력 저하를 인정하고 대규모 성능 개선 공사를 실시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된 치도리의 경우 개장 요령은 이하와 같았습니다. 1) 장비된 12.7센치의 포탑식 주포를 모두 철거, 대신 12센치 단장포를 3기 설치한다.(22톤 감소) 2) 연장 발사관 1기로 예비 어뢰도 모두 철거.(40톤 감소) 3) 함교 구조를 1층 삭감, 전성관도 철거. 4) 함저에 밸러스트 킬을 달고 추가로 밸러스트 98톤 탑재 5) 현외 벌지 구조물 철거 이 개조로 기준 배수량은 600톤까지 증대, 계획시의 속력 30 노트였던 것이 28 노트까지 다운됩니다만 대신 복원성 범위는 118.5도까지 개선되었지요. 이 희생의 댓가로 4번정은 사건 발생 당시 건조중이었지만 이러한 개조 포인트를 모두 도입한 상태로 준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너무 욕심장이인 함은 뒤끝이 상당히 않좋습니다.....-ㅅ-; 여기선 일본의 우학사건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이 시기에는 다른 해군국도 이런 말도 안되는 소형함을 다수 건조한건 매한가지였습니다. - 다만 이 우학사건 이후 대부분 일본과 비슷한 개량공사를 거치게 되었죠. - 이런 쓰디쓴 경험이 있어어인지(?) 이후의 일본 군함과 그 뒤를 이은 현재의 해자대 함선들은 철저히 함형이 정돈된 모습입니다.(오히려 요즘 한국해군의 신형 구축함들이 더 과밀해 보인다고 느낀건 저뿐만인가요?) 아마 개함의 성능보단 "균형잡힌 함대 단위" - 로서 군함의 성능을 최적화시킨 함대를 꾸리는게 현재 해자대의 목적일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되더군요 이런점에서는 상당히 양호한 구성이라고 생각됩니다. 강력한 몇대의 함으로 이뤄진 함대와, 균형잡힌 다수의 함으로 이뤄진 함대 중 어느것이 더 강한지는 과거의 수많은 해전사가 증명해 줬습니다만 어째 이게 거꾸로 가고 있는것만 같아서 안타깝다는 사설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