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니까 일제시대 얘기 한 토막.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는 1907년 시즈오카에서 태어났습니다. 1928년에 입대한 이소가야씨는 조선군에 배치돼 함경도 지역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회고에 의하면 행군 도중 한 농가에서 물을 얻어마시고 그 집 식구들과 인사를 나눈 것이 계기가 되어 제대 후 조선에서 살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처음의 꿈은 과수원을 차리는 것이었는데, 과수원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북한 지역을 대륙 침략의 후방기지로 만들기 위해 각종 공장을 수 없이 건설했는데, 이소가야씨가 취직한 곳은 하필이면 조선 질소비료 주식회사 흥남공장. 일명 살인공장으로 불릴 정도의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일본인이 선호할 만한 직장은 아니었고, 직장 동료의 대부분은 조선인이었습니다.
그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이소가야씨는 노동운동에 눈뜨게 됐고,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 재건운동을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됩니다.
그 사건 이후, "조선에는 일자리가 많으니까 돈 벌어서 과수원이나 차려야겠다."는 꿈을 꾸며(당시 대부분의 조선인에게는 진짜로 꿈 같은 소리였지만...) 조선에 눌러앉았던 청년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너는 내지인이면서 왜 본국의 방침에 저항하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억압에 저항하는 건 노동자에게 당연한 일이며,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라고 받아친 이소가야씨는 유죄판결을 받고 9년 7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태평양 노동조합 사건, 일명 태로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일제시대 노동탄압 중 가장 큰 규모의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참가자들은 단순한 노동쟁의가 아니라 반국가 활동으로 기소됐고, 최상위 주동자에게는 징역 10년형이 언도됐습니다.)
그렇게 반국가행위 전과자가 된 이소가야씨였지만...해방이 되자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동지들, 사상범 감방에서 같이 옥살이를 한 감방 동료들이 소련군정 아래에서 다들 완장 하나씩을 찬 것입니다. 그런 연줄에 더해 노동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한 경력은 그 자체로 소련군정의 호감을 샀고, 그 덕분에 이소가야씨는 다른 일본인들과는 달리 억류는 고사하고 북한 인민위원회와 협력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습니다.
북한지역의 일본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된 이소가야씨는 함흥에 있는 일본인 수용소를 찾아갔고, 거기에서 수습도 안 된 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시신들을 보고 업보가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구나, 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소가야씨는 조선인 동료(그 중에는 그 유명한 주인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소련군과 교섭을 해 북한지역의 일본인들이 남한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소련군의 승낙을 얻어냅니다.
(당시 미군이 일본인들을 최대한 빨리 본국으로 돌려보내려고 한 데 비해 소련은 억류된 일본인을 노동력으로 간주, 최대한 오래 붙잡고 있으려고 했습니다.)
45년에서 46년 사이에 북한 지역의 수용소에서 죽은 일본인이 20000명 가까이 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소가야씨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진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 후에는 아무런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못한 채 무명의 언론인이자 저술가로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전후에 일본 공산당 같은 데에서 활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그가 애착을 가졌고 거의 제2의 조국처럼 생각했던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고 대숙청을 한 것에 상심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재판정에서 '조선의 60만 내지인 중 유일한 비국민'이라는 모욕을 들었던 이소가야씨. 하지만 그가 일본의 애국자들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동포의 목숨을 수없이 구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비국민 행위 덕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신들이 입은 고난을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전쟁 행위에 따른 결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의 반세기에 걸친 박해가 있었다는 것을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했을까. 그저 자신들이 조우했던 고난에만 매몰되거나, 혹은 조선 민족을 가해자로 생각하고 이들을 미워하며 조선을 떠나지는 않았는지..."
이소가야씨가 1991년에 쓴 마지막 저서, '좋은 날이여 오라-북조선 민주화를 위한 나의 유서'의 한 구절입니다. 애석하게도 이소가야씨의 저서는 80년대 말에 딱 한권, '우리 청춘의 조선'이 운동권 계열 출판사에서 번역됐을 뿐이고, 그나마도 지금은 구하는 게 어려운 상황입니다. (뭐, 당장 저서가 문제가 아니라 이소가야씨 본인에 대한 자료도 찾기 힘들더군요. 혹시 다른 정보가 있으신 분들은 동냥 좀...)
이소가야 스에지씨의 저서들
식민지의 감옥-혁명가의 경험적 기록 植民地の獄―革命家の經驗的記錄 (1949)
조선종전기 朝鮮終戰記 (1980)
우리 청춘의 조선 わが靑春の朝鮮 (1984)-1988년에 번역되었으니 금방 절판됨.
좋은 날이여, 오라-북조선 민주화를 위한 나의 유서 良き日よ、來たれ―北朝鮮民主化への私の遺書(1991)
가만 보니...국내 번역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들이네요. --a